Updated : 2026-04-11 (토)

디폴트옵션 도입... 이래도 퇴직연금 그대로 둘래?

  • 입력 2021-12-06 12:00
  • 김상훈 백브리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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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퇴직연금 사전지정제도를 도입하는 내용을 담은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습니다. 이를 두고 디폴트 옵션이 도입된다는 보도들이 나옵니다. 디폴트 옵션은 근로자가 투자상품을 선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선택되는 상품이 있다는 뜻인데요. 실제로 이렇게 되는 걸까요?

바뀌는 내용은 사실 디폴트 옵션과는 살짝 거리가 있습니다. 운용지시를 내리지 않은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 가입자에게, 5개 범주의 상품군을 무조건 선택하도록 하는 게 사전지정제도입니다. 타겟데이트펀드(TDF)를 비롯해 단기금융상품 투자형 펀드, 인프라 투자형 펀드, 혼합형 펀드, 여기에 예·적금 같은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건데요. 선택을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선택해야 하는 거니 엄밀하겐 디폴트 옵션이 아닌 거죠.

사실 이미 법적으론 아니지만 디폴트 옵션은 우리 퇴직연금 제도 안에 있습니다. 2018년 금융감독원이 퇴직연금 약관에 DC형 가입자가 투자상품을 선택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예금상품에 투자하도록 해뒀기 때문인데요. 법에만 없었지만, 사실상 디폴트 옵션이 작동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번 사전지정제도는 DC형 가입자가 선택지를 좁힐 수 있도록 하는 게 골자입니다. 퇴직연금 관련 상품이 2,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선택지를 좁히면 자연스레 펀드에 투자하는 사람이 늘어나겠죠. 굳이 표현하자면 하이브리드, 혹은 선택형 디폴트 옵션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기준 255조 원 퇴직연금 중에서 확정급여(DB)형 비중이 60%를 넘습니다. DC형은 26%, 개인형퇴직연금(IRP)가 14%입니다. 이 중 89%가 원리금 보장형 상품입니다. 이렇다 보니 수익률도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원리금 비율이 4%인 미국은 지난해 기준 수익률이 14.8%에 달합니다. 우리나라 퇴직연금 수익률은 2.6%에 불과합니다. 2013~2019년 평균 수익률도 미국은 9.49%, 우리나라(2.27%)보다 4배가량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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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률이 차이가 나니 퇴직 때 받는 돈도 크게 벌어집니다. 하나금융연구소에서 재밌는 내용의 보고서를 낸 적이 있습니다. 미국 프리츠 씨는 1985년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50대 후반인 지금 연봉이 10만 달러(1억1,500만 원) 정도입니다. 2023년 은퇴 예정인데요. 퇴직연금 계좌에 94만 달러(10억8,000만 원)가 쌓여있습니다. 요즘 말로 ‘금(金)퇴족’이라고 한다죠.

반면 한국 이 씨가 처한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2017년 퇴직한 그는 퇴직 직전에 1억 원 정도의 연봉을 받았다고 합니다. 퇴직연금의 수익률은 1~2% 정도. 중간 정산으로 미리 받은 퇴직금을 빼고 나면, 잔액은 5,000만 원에 불과합니다. 국민연금이 나오는 65세까지 돈을 버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선택형 디폴트 옵션을 도입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노후보장은 사실상 국민연금이 유일합니다. 하지만 수령 나이가 65세죠. 민간기업의 정년은 55세입니다. 그보다 빨리 회사를 떠나는 사람도 많죠. 이렇게 퇴직 이후 국민연금 수령까지 붕 뜬 시간을 ‘소득 크레바스’라고 표현하는데요. 평균 12.5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퇴직금의 수익률을 높여야 한다는 거죠.

사실 퇴직연금 제도개선이 너무 늦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외에선 대부분 디폴트 옵션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2018년에 도입했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도입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과 에스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공화국 등 4곳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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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일종의 이권 다툼이었습니다. 금융회사별 퇴직연금 시장 점유율을 보면 은행이 51%, 보험이 27%, 증권이 20% 정도입니다. 은행·보험이 80% 정도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예금이나 적금 등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투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A은행이 B회사 퇴직연금을 수탁하기로 했다고 가정해봅시다. B회사의 갑동이가 운용지시 안 내리면 어떤 선택을 할까요? 사실상 지금까진 예금이 디폴트 옵션이라고 했죠. 그러면 C은행이나 D보험사 원리금 보장상품을 투자상품으로 선택하게 되는데요. 자기 회사 예금에는 넣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C은행이나 D보험사도 다른 회사 퇴직연금 사업 따내면, 당연히 A은행에 보은을 하겠죠. 그렇게 서로 상부상조 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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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도 쏠쏠합니다. 지난해 기준 원금보장형 상품 수익률이 1.7% 정도. 은행은 돈을 이렇게 조달하면 대출해준 뒤 예대마진을 챙깁니다. 보험사는 이 돈을 채권 등에 투자했겠죠. 여기에 퇴직연금 기본보수 등의 비용도 받습니다. 이게 0.4% 정도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싼 금리로 조달한 돈으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근로자가 받는 이자는 산술적으론 1.3% 정도밖에 안 됩니다. 또 은행이나 보험사가 이런 장사를 손에서 놓을까요? 수익률 높은 펀드를 고객에게 추천하는 게 오히려 손해인 구조인 셈입니다.

물론 증권사도 보고만 있진 않았습니다. 열심히 영업은 했지만, 역부족이었다는 건데요. 근로자들이 퇴직금 운용에 큰 관심이 없다 보니 돈이 DB형에 쏠리고, DC형인데도 80%가 원리금 보장형을 선택하는 상황이니 펀드 위주로 굴리는 증권사엔 쉽지 않은 환경이었겠죠.

늦었지만 이번에 법 개정을 성공시킨 금융투자협회에선 이런 얘기도 합니다. 제도개선을 꾸준히 요청했지만, 번번이 국회에서 막혔다는 겁니다.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최근엔 기본보수를 안 받는다는 조건으로 영업을 한다는 거죠.

이런 와중에 국회에서 디폴트 옵션 도입 얘기가 나온 겁니다. 은행과 보험사 입장에선 난리가 난 거죠. 퇴직연금 사업장 유치하는 증권사도, 펀드 상품 파는 자산운용사도 은행·보험사의 고객 뺏어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긴 겁니다. 다만 은행과 보험사가 도입 조건으로 원금보장형도 선택지에 넣어달라고 요청해 결국 반쪽짜리 도입이 되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원금보장형 상품이 선택지에 들어가면서 좀 웃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나라 퇴직연금은 외국과는 다른 구조입니다. 먼저 은행과 보험, 증권사 같은 금융회사가 퇴직연금 사업장을 유치합니다. 그리고 원리금 보장상품이나 자산운용사의 펀드 상품을 골라서 고객에게 추천하는 구조죠.

지금까지는 근로자가 상품을 선택하지 않은 게 문제였죠. 그래서 선택지를 줄여준 건데요. 이제는 5개 상품 유형 중에 하나를 무조건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유형에 맞는 상품을 금융회사가 ‘디폴트’로 붙여주는 거죠. DC형 가입자 중에서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선택하고 싶은 사람은 처음부터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게 어려워서 선택형 디폴트 옵션을 도입한 건데, 거기에 또 예금이나 적금 같은 상품이 선택지로 포함된 겁니다. 금융투자업계에서 황당하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해외에선 대부분 퇴직금을 기금 방식으로 운영합니다. 퇴직금 운용을 나눠 갖는 구조 자체가 안되는 거죠. 또 대부분 디폴트 옵션은 TDF 같은 수익률이 높은 상품입니다. 원리금 보장형 상품이 디폴트 옵션인 나라는 일본이 유일합니다. 일본은 수익률이 우리나라보다 낮죠.

TDF는 타겟데이트펀드(Target Date Fund)입니다. 목표 시점을 정해두고 그때그때 시기에 맞게 전략을 바꿔 투자하는 전략을 쓰죠. 예를 들면 젊었을 때는 공격적으로 투자해 수익률을 높이고, 퇴직 시점을 앞두고는 안정적인 전략을 통해 최대한 많은 퇴직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영국에서는 RDF(Retirement Date Fund)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이는 성공적 사례로 꼽히는 곳이 미국과 호주입니다. 미국은 퇴직연금 시장이 엄청나게 발달했죠. 시장 규모가 30조 달러에 육박합니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이 20조 달러인데, 이보다 더 크죠.

미국 근로자는 401(k) 플랜 같은 퇴직연금에 자동으로 가입됩니다. 적립액이 급여의 1%면 회사가 다 내주고, 1~6%면 절반을 회사가 보조해주는 방식입니다. 기금이 선택할 수 있는 디폴트 옵션용 적격 투자상품이 TDF와 혼합형 펀드, 맞춤형 펀드, 원금을 지키는 방식의 채권투자형 펀드 등 4가지입니다. 다만 대부분 퇴직연금의 디폴트 옵션은 TDF라고 합니다.

호주는 슈퍼에뉴에이션이란 강제가입 퇴직연금이 있습니다. 그 밑에 소매형 기금, 산업형 기금, 공적기금 등 5개 유형의 기금이 있습니다. 소매형은 영리기업이고, 나머지는 비영리. 각 기금은 마이수퍼라는 디폴트 옵션을 미래 정해놓는데요. 혼합형 펀드나, TDF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해. 각 기금은 그걸 가입자에게 알립니다.

최근 TDF가 주목받고 있죠. 올해 기준 순자산이 10조 원에 조금 못 미칩니다. 올해만 5조6,000억 원이 늘었다고 합니다. 지난해 기준 퇴직연금 내 TDF의 규모가 3조2,000억 원 정도인데, 올해는 조금 더 늘었겠죠. TDF를 포함해 전체 라이프사이클펀드의 수익률도 8.1%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렇다 보니 앞으로 퇴직연금 시장도 바뀔 거란 예측이 많이 나오고 있죠. 아직 법안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진 않았지만, 공시가 강화되면 근로자도 수시로 수익률을 확인해 상품을 바꿀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우리나라 노후에 믿을게 퇴직금밖에 없으니 아무래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기도 한 측면 있습니다. 변화가 더딜 수 있다는 얘긴데요. 일단 한 발 내디뎠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김상훈 언더스탠딩 기자 ksh-3protv@outloo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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