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은 양치기 소년일까요. 지난 1일 이런 공시를 했죠. 5억 달러 규모 외화 신종자본증권(이하 영구채)의 콜옵션(조기 상환권) 행사를 포기하겠다! 어려운 얘기 같지만 간단합니다. 돈을 빌렸는데, 갚는 걸 미루겠다는 겁니다. 근데 불과 일주일여 만에 말을 180도 바꿨습니다. 콜옵션 행사해서 돈을 갚겠다는 건데요. 무려 5,600억 원이나 되는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닐 텐데요.(뚝 떨어진 게 맞을지도.)
흥국생명이 말을 바꾼 사이 채권시장에선 큰 혼란이 있었습니다. 흥국생명 영구채를 포함한 국내 보험사 신종자본증권의 가격이 뚝 떨어졌고요. 외화채권시장에서 한국물(Korean Paper)도 마찬가지. 가뜩이나 레고랜드로 돈줄이 마른 국내 채권시장의 불안심리도 더욱 커졌죠. 우리나라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도 훌쩍 뛰었고요. 이런 일을 벌여놓고 말을 바꾼다? 관건은 이겁니다. 이럴 거면 왜 처음부터 갚겠다고 하지 않았냐? 그럴만한 상황이 있어서 그랬던 거냐? 아니면 금융당국이든, 흥국생명이든 안일하게 대처해서 뒷북으로 수습한 거냐? 여러 질문이 생길 수 있죠. 오늘의 ‘언더스탠딩(Understanding)’은 흥국생명의 영구채 사태의 전말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흥국생명은 정말 불가피한 선택을 했던 건지. 금융당국은 뭘 한 건지 등등을 꼭 알아야 하는 이유. 금융기관을 비롯해 기업들 신용위기가 다가오고 있죠. 준비하려면,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①2017년 흥국생명이 5억 달러 규모의 외화 영구채를 발행합니다. 영구채는 말 그대로 만기가 없는 채권입니다. 그래서 자본으로 인정이 되죠. 당시 국내 보험사들 자본확충 문제가 화두였는데요. 국내에서 영구채를 발행해 봤자 소화가 안 됐던 겁니다. 그래서 금융당국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도 외화채권 발행할 수 있게 해달라! 은행도 하고 있지 않냐! 그 첫 주자가 바로 흥국생명이었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무늬는 영구채라고 했죠. 영구채는 만기가 없고, 대신에 시간이 지날 수로 금리가 ‘스텝업(Step-up)’합니다. 그래서 발행사에서 콜옵션이란 권리를 들고 있죠. 금리가 너무 오르면 그냥 갚아 버릴 수 있게요. 보통은 발행 후 5년 뒤부터 금리가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콜옵션을 행사할지 말지 결정을 하고. 보통은 콜옵션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죠. 왜냐 금리가 갑자기 훌쩍 뛰니까요.
근데 흥국생명의 영구채는 실상은 5년 만기 채권입니다. 이게 무슨 멍멍이 소리냐고요? 계약은 만기가 없는 영구채로 했지만, 팔 때 이런 약속을 구두로 한 겁니다. 5년 뒤에 갚겠다. 한국 은행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지 않냐. 그래서 관행처럼 5년 콜옵션을 반강제로 행사하게 되는 거죠. 바꿔 말하면, 빌린 돈을 조기에 상환하는 겁니다. 5년마다 돌려막기!(이걸 자본으로 인정해 준다는 게, 사실 흥국생명 사건의 본질입니다.) 웃긴 건 이런 겁니다. 똑같은 영구채인데 국내 금융기관의 금리가, 글로벌 금융기관의 영구채보다 금리가 낮다는 것! 와 우리 금융기관 쵝오? 아니죠. 영구채인데 5년 뒤엔 갚겠다고 약속하고 발행을 하니 금리가 훨씬 낮은 거죠.
◇"7%면 사겠다" 수요에, 조기상환 하겠다고 9월 공시
②여튼 이런 상황에서 금리가 뛰는 발행 후 5년이란 기한이 다가왔습니다. 흥국생명은 9월 7일 차환용 영구채 발행을 결정합니다. 싱가포르로 날아가서 IR도 하고 왔죠. 7%대의 금리로 영구채를 발행할 수 있다는 수요예측 결과를 들고 귀국했죠. 그리곤 콜옵션 행사하겠다고 투자자에게 통지를 하면서, 아예 못을 박습니다.
흥국생명의 통가 어떤 효과를 가져왔냐. 실제로 시장에선 흥국생명이 조기상환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죠. 시장이 이러해서 차환 발행이 쉽지 않아 보였으니까요. 당연히 영구채의 가격이 내려갔겠죠. 근데 조기상환 한다? 가격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겁니다. 못 갚을 줄 알았는데 갚네? 그래 한번 믿어보지. 시장이 이렇게 판단했던 겁니다.
◇시진핑 3연임에 '조기 클로징' 아시아 채권시장... "사겠단 사람이 없었다"
③그런데 말입니다. 10월 중순이 되니 상황이 아예 달라진 겁니다. 시진핑의 3연임 때문에 아시아 채권시장이 급속히 냉각했죠. ‘차이나리스크’ 얘기가 터져 나왔고. 올해 아시아 채권시장은 조기 클로징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흥국생명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습니다. 조기상환일이 11월 9일인데. 차환용으로 발행하는 영구채를 사겠다는 사람이 아예 안 나타나는 겁니다. 흥국생명은 당시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파트를 내놔도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야 가격을 흥정하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콜옵션 행사 포기, '외통수' 였나?
④그래서 11월 1일 콜옵션을 행사하겠다던 공시를 번복합니다.(수천억 원이 오가는 자금시장에서, 공시 번복이 웬 말인가요.) 차환용 영구채 발행을 못 하게 됐으니. 우리는 돈을 갚는 걸 미루고, 대신에 금리가 오르는 건 감내하겠다.
합리적 선택이죠. 금리가 뛰었다지만 7%인 채권을 갚고, 10%를 넘는 채권을 새로 발행한다?(흥국생명이 얼마의 금리까지 시장에 태핑했는지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만.) 이 정도 셈법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돈은 안 갚겠다는 것도 아니고. 6개월 미루되 금리만 더 쳐주는 거니까요. 6개월 뒤에 시장 사정이 나아지면 그때 차환발행해서 갚을 수도 있고요. 더구나 사겠다는 사람이 없다? 흥국생명은 불가피했다는 설명을 합니다. 이른바 ‘외통수’라는 거죠. 근데 시장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흥국생명이 신뢰를 깼다는 것! 사실 콜옵션 행사는 전적으로 발행사의 권리입니다. 행사하든 안 하든. 하지만 한국물의 특성이 있다고 했죠? 무늬만 영구채고 실상은 5년물이라고 했죠. 근데 행사하겠다고 했다가, 다시 안 한다고 하다니. 돈 빌린 사람이 원금 갚겠다고 했다가, 다시 미루겠다고 하면 나라도 빡치겠죠. 여튼 그래서 이제 한국물은 믿을 수 없다는 평가가 나오고, 그래서 가격이 폭락한 거죠.
⑤우여곡절의 1주일이 지났습니다. 여기저기 난리가 났죠. 그래서일까요?(여전히 미스테리입니다만.) 흥국생명이 다시 말을 바꿉니다. 지난 7일 콜옵션 행사하겠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내죠. 차환용 영구채 발행했냐고요? 아니요.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서 5,600억 원 갚겠다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흥국생명 사태 타임라인의 재구성입니다.
◇왜 처음부터 갚지 않았나
자 그럼 의문점이 몇 가지 생기죠. 첫 번째, 처음부터 그냥 갚았으면 되는 거 아니냐! 어차피 결국 돈 갚겠다고 했으니까요. 왜 불필요한 비용을, 본인이 아닌 우리가 치르게 한 걸까요.
뭐 이런 사정이 있긴 합니다. 보험사는 자본증권을 맘대로 차환발행도, 상환도 할 수 없습니다. 보험업법 감독규정에 이런 원칙이 있는데요. 문구 그대로는 아니고,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①자본증권을 상환할 때는 지급여력비율(RBC) 비율이 150% 밑으로 떨어지면 안 된다. RBC 비율은 이런 거죠. 보험 계약자가 일시에 보험금을 요청했을 때를 대비해서, 적어도 그 금액의 100%는 들고 있어라. 금감원은 150%를 권고치로 맞춰놓고, RBC 비율이 그 밑으로 떨어지면 자본을 늘리라고 얘기를 하죠.
근데 흥국생명의 RBC비율은 157%(6월 기준)입니다. 자본으로 인정되는 영구채 5,600억을 갚는다? 그럼 당장 RBC비율이 150% 밑으로 떨어지겠죠. 그러면 금감원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뭔솔? 니네 자본 먼저 채워 넣어!
하나 더 있습니다. ②자본증권을 차환발행할 때는 기존 금리보다 높거나, 비싸게 발행해서도 안 된다. 이 두 가지를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 다 금감원장에게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당연히 아니다 싶으면 승인을 안 해주겠죠.
쉽게 얘기하면. 돈만 갚는 건 안되고, 차환발행도 금리가 너무 높으면 안 된다! 콜옵션 행사를 포기한다고 했을 때, 저 두 원칙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죠.(어, 이상한데? 라고 지적하실 예리한 분을 위해서.) 물론 9월에 7%대로 차환발행하겠다는 것도 이 원칙에 어긋나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만. 금감원에서 이 정도는 허락해 주자고 관련 부처를 설득했다고 합니다. 결국 실패했지만요.
결국은 흥국생명이 돈을 갚기로 했죠. 4,000~5,000억 원 규모의 환매조건부채권(RP)이라는 단기물을 발행하면, 이걸 4대 시중은행이 사갈 계획입니다. 그리고 1,000억 원 정도는 보험사가 대출을 받는 거죠. 그렇게 일단 돈을 갚고. 떨어진 RBC 비율을 채우기 위해 유상증자를 하겠다는 겁니다. 태광그룹이 돈을 집어넣기로 했고요.
◇'양치기' 흥국생명? 두 번이나 말 바꾼 이유는?
그러면 왜 또 흥국생명이 말을 바꿨냐? 사실 이 부분이 미스터리입니다. 금융당국이 주리를 틀었을까요? 아니면 흥국생명이 갑자기 돈이 생긴 걸까요? 여기서부터는 온전히 추정의 영역입니다만, 여러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죠.
정부는 흥국생명의 영구채 차환발행 진행 상황을 세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외화채권을 발행하려면 외환당국인 기획재정부에 신고해야 하고요. 자본증권을 상환하려면 금감원장 승인도 받아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9월부터 면밀하게 협의를 해왔을 테고요. 10월 중순부터는 문제가 생겼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요건 팩트. 실제로 지난 2일 '흥국생명 조기상환권 미행사 관련'이란 제목을 보도자료를 배포했죠.) 그때부터 여러 시나리오를 생각했을 수 있죠.
시나리오1. 흥국생명이 우선 콜옵션 행사를 안 한다고 입장을 바꾼다. 그러면 한국물의 신뢰가 깨질 테고, 가격은 폭락하겠죠.(실제로 그랬고요.) 그리고 외화채권시장에서 우리 기업이 자금을 조달하기가 어려워지게 됩니다. 금리가 급등할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 기업들 외화채권 발행계획을 살펴본 거죠. 봤더니 올해는 일단 발행계획이 거의 없었던 겁니다. 더구나 차이나리스크 때문에 이미 아시아 채권시장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고 했죠.
그리고 싱가포르와 홍콩의 외화채권시장에 물어본 겁니다. 그랬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흥국생명이 콜옵션 행사를 안 한다고 해도, 한국의 은행이 발행하는 신종자본증권은 문제없이 소화된다. 상황이 이렇다? 고금리로 무리해서 차환발행하는 것보다는 그냥 흥국생명이 감내하는 선에서 끝내자고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당장 5,600억 상환한 돈도, 빠지는 자본 채울 유상증자도 어려워
시나리오2. 흥국생명에 돈을 갚게 하고, RBC는 대주주 유상증자로 끌어올린다.(결국 이렇게 됐죠.) 이렇게 분명 제안했을 겁니다. 근데 태광그룹 입장에선 이게 쉽지 않습니다.
우선 당장 9일 돈을 갚아야 하는데, 그때까지 5,600억 원 만드는 게 쉽지 않습니다. 흥국생명이 돈이 없는 보험사는 아닙니다. 자산이 30조 원이나 돼요. 보유자산을 팔아야 하는데. 만기가 되지 않은 예금을 깨면 그만큼 손해일 테고. 채권을 팔자니 채권 가격이 바닥이죠. 당장 5,600억 원을 만들 방법이 없는 겁니다.
또 하나. 유상증자도 쉽지 않습니다. 흥국생명의 대주주는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입니다. 지분율이 56%. 5,000억 원 유상증자한다? 그러면 그룹 오너가 2,800억 원을 사재 출연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죠. 될까요? 아니면 3자 배정을 통해 태광그룹 계열사가 돈을 집어넣거나, 투자자를 유치해야 하는데요. 이도 쉽진 않은 겁니다. 그래서 흥국생명이 콜옵션 행사를 포기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참고할 사안 하나. 2003년 카드사태때 LG카드가 금융당국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대주주 유상증자를 약속했지만. 결국 실패했는데요. 이런 상황이 다시 반복되지 않길.)
그리고 콜옵션 행사 포기가 그렇게 비난받을 일도 아닙니다. 이런 일이 왕왕 있었으니까요. 2019년엔 스페인의 산탄데르, 2020년엔 독일 도이체방크와 영국 로이드도 콜옵션을 미이행했습니다. 다들 글로벌 대형은행이죠. 한술 더 떠 최근 호주 금융당국(APRA)는 보험사에 이런 레터를 보냅니다. 자본증권을 더 높은 금리, 혹은 더 비싼 증권으로 바꾸지 마라! 쉽게 얘기해 자본증권의 콜옵션을 행사하지 말라는 겁니다.(물론 흥국생명의 무늬만 영구채인 자본증권과는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요.)
흥국생명이 말을 안 들으면, 당국이 나서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금융당국도 여기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죠. 요즘은 당국에서 이러면 직권남용으로 철컹철컹하는 시대니까요. 이런 가정을 해보죠. 흥국생명이 금융당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RP를 발행해서 수천억 원을 조달할 수 있었을까요? 또 자금시장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면, 금융당국이 나서서 흥국생명을 도와줬을 수 있을까요? 당장 특혜 시비가 일 수밖에 없겠죠. 결국 문제가 생겼으니, 금융당국이 도와줄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겁니다. 똑같은 행위지만, 어느 각도에 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무늬만 영구채, 그대로 둬도 되나?
뭐 여튼 우여곡절은 겪었지만 다행히 흥국생명 사태는 일단락됐습니다. 우리나라 외평채 5년물의 CDS 프리미엄도 내리고 있고요. 물론 아직도 살얼음판이긴 합니다. 시장도 극도로 민감해져 있고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랄 수 있는 상황. 그만큼 금융당국이 섬세하게 자금시장을 다뤄야 하겠죠. 지금과 같은 혼란이 반복되면, 더 진창으로 빠질 수 있다는 교훈을 이번에 제대로 새겼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왜 사실상 만기가 5년짜리인 무늬만 영구채를 자본증권으로 인정을 해준 것이냐! 뭐 그간 국내 금융사가 해외에서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했다고 하면, 나름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는 볼 수 있죠. 근데 이건 아니잖아요. 원칙의 문제니까요. 금융당국도 알고도 모른 척 눈을 감았던 건데, 이런 비상식적인 관행은 없애야 하지 않을까요?